목욕탕의 시작과 역사

 

목욕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생겼다. 최초의 공중 목욕탕은 기원  4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생겼다. 당시 목욕은 시녀가 몸을 닦아주고, 젖은 몸을 닦아주고 기름을 발라주었다. 목욕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함께 닦인다는 인식이 있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청년들이 운동을 하는 체육 시설이 생기게 되자 자연스럽게 목욕탕도 함께 필요로 하게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목욕 문화가 확산되면서 부유층들을 집에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수로가 생겨 많은 사람들이 공공목욕시설을 사용하게 되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목욕탕은 기술적인 문제로 수시로 물을 환수하지 못해 많은 세균과 기생충들로 인해 전염병이 생겼다. 깨끗한 시설이었던 목욕탕이 점차 전염병을 전파 시키는 역할을 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발생했었던 것이다.

 

중세 시대에는 목욕을 하러 가는 것이 매춘을 하러 간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 목욕 대신 사우나가 보급이 되면서 증기 목욕이 유행하게 된다. 결국 중세 말에는 목욕탕에서 전염병이 퍼지게 되면서 목욕탕의 순 역할과 대비되게 병에 걸리고 매춘을 하는 곳이라는 기괴한 풍습이 생겨 목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빈의 경우에는 공중목욕탕이 100여개나 설치될 만큼 인기시설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중세시대 보다 더 씻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은 많은 것에 비해 사회적 시설은 점차 열악해졌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위생을 생각하려면 물을 길러 올 수 있는 상수도 시설이 필요한데, 당시는 그런 시설과 연료가 기술적으로 퇴화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향수가 널리 쓰이게 된 것도 이때부터 였다.

 

이슬람교의 목욕

 

이슬람에서는 알라를 뵙기 전 몸을 씻는 곳이 있었다. 현재에도 이슬람 성원 앞에는 손이나 발을 씨기 위한 시설이 많이 있다. 그 덕분에 목욕탕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곳이 튀르키예이다.

이슬람은 고여있는 물은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욕조는 없지만, 물이 나오는 곳에서 계속 물이 흘러나오게 하여 고이지 않고 흘러넘치도록 유지하고, 별도로 샤워기도 비치되어 .

튀르키예의 목욕 방식과 우리나라의 현재 목욕 방식은 현대화가 되면서 위생 도구가 많아지긴 했지만, 때를 불리고 세신사가 때를 밀어주는 것은 두 나라의 매우 유사한 목욕방식이다.

 

우리나라의 목욕도입 

 

우리나라의 목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신라의 박혁거세의 탄생 화에 따르면 알에서 태어난 아기를 씻기자 빛이 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중요한 의식이었음을   있는 대목이다.

 

신라 시대에는 국교를 불교로 지정했기 때문에 나체로 자주 목욕을 했었다. 훗날 고려 시대가 되었을 때도 불교의 목욕재계 율법은 계속되면서 우리 족의 목욕하는 문화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일신라시대에 증기욕이 발달하면서 일본에 전파되어었고, 일본 서민들의 공동탕으로 확산되었다는 일본 기록이 있다.

목욕은 고려 시대부터 병의 치료와 예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원양으로 온천욕을 즐기러 가기 위해 행궁을 설치했을 정도이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가 아닌 유교 사상을 중시하기 때문에 나체로 목욕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로 간주되어 옷을 걸치고 목욕을 하였다. 옷을 걸쳤기 때문에 전신 목욕은 드물어 지면서 개별 가옥에는 목욕탕이 없었으며, 주로 부분 목욕을 얕은 강이나 호수에서 했다.

전신욕을 하는 날은 연례행사로 별도로 행해졌다.

 

개항 이후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목욕 시설의 불편함을 호소하였지만 개인적으로 가옥 안에 목욕탕을 설치하였다.

개인 주택 안에 목욕탕을 설치하는 유행이 번지자 점차 숙박업소에서도 목욕 시설이 갖춰 진 사업장을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대중목욕탕 

우리나라의 대중목욕탕의 확산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자주 목욕을 하는 일본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부터이다.

당시에는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것 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천한 행동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의 공중 욕탕 설치 요구는 한국 사람들에게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이렇게 목욕 문화는 계속 이어져 오면서 1905년 서울 서린동에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을 문을 열었지만, 나체인 상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문화라서 오래 유지하지 못한  폐업을 하고 말았다.

 

최초의 목욕탕이 문을 열고 14년이 지난 뒤에 왕실에 목욕실이 설치되 었다. 대중목욕탕의 확산은 1920년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일본고객이 주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이태리타올과 목욕관리사도 생겨나고 한국의 목욕문화가 만들어 지면서 타국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이국적인 풍경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광복 이후 사설목욕탕이 확산되자 국가 차원에서 시설 규정을 제정하였다.

 

목욕탕 소멸위기

1990년 중후반에 찜질방이 생기면서 현재 대다수 대중목욕탕에서는 찜질방과 겸업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음식점, 노래방도 설치가 되어 있어 온종일 있어도 심심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목욕을 위해 목욕탕을 찾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각 가정마다 욕조를 설치하고 목욕보다는 간단한 샤워 정도로만 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새해가 다가오는 11일을 앞둔 시기가 되면 목욕탕이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데, 묵을 때를 벗겨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하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코로나 이후 가장 큰 피해를 본 업소  하나가 목욕탕이였고, 현재는 코로나의 여파로 대중목욕탕이 아닌 1세신샵을 운영하는 사업자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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