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열차)는 어떤 운행 수단인가?


기차는 철도 위를 달리는 한 대 이상의 열차가 일렬로 연결되어 있는 차량이고 세계에서 가장 긴 이동 수단이다. 증기 기관차를 부르는 말에서 기차라는 줄임말을 쓰면서 열차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에는 기차라는 언어에 여객차, 화물차 등으로 확대된 의미로 사용 중이다.


열차의 시작과 변화


열차의 역사는 철도의 탄생하면서 시작되지만, 그 역사가 모두 함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열차는 증기기관차를 시작으로 디젤기관차, 전기기관차 시대로 나뉜다.
증기기관차 시대
1804년에 영국에서 리처드 트레비식이라는 사람이 페니다렌이라는 이름의 증기기관차를 최초로 발명하였다. 증기기관차는 19세기~ 20세기 초까지 산업혁명의 주 역할을 하면서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주철로 만들어졌던 철로가 기관차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자주 망가지는 문제가 발생하여 상용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후 조지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 연철을 이용해 선로를 만들어 기관차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개량하였다.
1825년 연철을 사용한 철도를 달린 로코모션 1호는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증기기관차가 되었다. 1830년, 조지 스티븐슨이 로켓 호를 만들어 증기기관차의 성능을 대폭 끌어올리자, 영국에서 철도 붐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이러한 붐은 근대의 세계적 육상교통수단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증기기관차는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철도는 디젤 열차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지만, 외국에서는 그 이후로도 증기기관차가 쓰였다.

디젤기관차 시대

1892년에 루돌프 디젤 박사가 디젤기관을 발명하였는데 이후 디젤을 동력으로 하는 디젤기관차가 발명되었고, 1930년대부터 디젤기관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디젤기관차는 2차세계대전으로 인해서 거의 모든 철도가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선로를 복구하면서 대중화되었다.
디젤기관은 한사람이 운행할 수 있었고, 증기기관차보다 소음이 개선되었고 운행 시작과 정지도 간편했다. 이로써 증기기관차의 단점을 극복하면서 더 신속하고 효과적인 열차가 생겼다.
디젤기관차는 전철화가 비효율적인 나라나 지역, 전차선을 설치하기 어려운 나라에서 오늘날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전기기관차 시대

디젤기관차와 비슷한 시기에 전기 열차도 함께 연구되어 발명되었다.
1837년 로퍼트 데이비슨이라는 사람이 전지로 움직이는 열차를 개발하였다. 하지만, 전지로 열차를 움직이는 것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첫번째 전기 철도노선은 볼티모어와 오하이오를 연결했던 볼티모어 벨트 선인데 전철화되어 운행한 최초의 노선이다.



전기기관차 시대


디젤기관차와 비슷한 시기에 전기 열차도 함께 발명되었다. 초기에는 전지만으로 열차를 운행하기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1895년에 전철화된 열차를 움직이는 최초의 노선이 등장하게 되었다. 전기기관차는 지하철도 도시철도에서 주로 설치되었다. 1960년 이후 전기기관차는 에너지 효율과 그 견인력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주고 있어서 점차 디젤기관차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다.
전기기관차는 점차 혁신을 거쳐 현재 고속열차의 바탕이 되었다.


우리나라 열차 도입과 그 역사


증기기관 철도 개통


1899년 일제강점기 시대에 물자 수송을 위해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이때 사용된 기관차는 증기기관차였다. 처음 개통된 노선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라고 불린 노선이었다. 당시 여객용 열차는 3개 열차로 운행이 되었는데, 1등 칸은 외국인, 2등 칸은 남자, 3등 칸은 여자로 구분하여 승차했다. 이후 호남선, 경부선을 차근차근 개통하였다.
한국전쟁 전에는 평양과 신의주까지 잇는 증기기관차가 운행되었다. 그러나, 당시 증기기관차의 힘이 부족해 역행하는 열차가 간혹 생겨 운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1920년에는 증기기관차를 국내에서 제작하게 되면서 증기기관차를 많이 생산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철도의 디젤 화에 따라 증기기관차는 점차 운행을 종료하게 되었다.


디젤기관차의 도입

1951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에 의해 50여대의 디젤기관차가 운행되었다. 주로 당시 철도는 피난용이 아닌 군사 장비를 수송하기 위해 운행되었다. 한국전쟁의 휴전안이 체결된 이후에도 4대의 디젤기관차는 사용되었다.
본격적으로 디젤기관차를 우리나라에서 제작하게 된 것은 1978년에 현대차량(주)에서 미국 EMD사와 제작에 관한 자격을 획득한 이후부터였고, 이로써 대한민국도 디젤기관 철도의 현대화와 국산화를 이루어 내기 시작했다.

전기철도와 고속철도

국내 전기철도는 1972년부터 도입되었고 1970년대에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의 전철화가 차례로 완공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24년에 개통한 금강산 전기철도를 운영되었지만, 본격적인 전기철도는 1972년부터 시작되었다.
1970~80년대 들어서 국내 산업철도의 수송량 증가로 인해서 고속화, 첨단화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후 2004년에 세계 4번째로 빠른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고속철도의 시대가 도래되었으며, 2010년부터 핵심부품을 제외하고는 국산화 90%에 성공하게 되었다. 현재는 수서발 고속철도인 SRT가 KTX와 노선을 공유하며 운행하고 있다.

기차의 발달 

점차 빨라진 열차의 속도는 국가의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쳐왔다. 고속철도의 발달을 통해 철도의 수송량은 비교할 수 없을 수준으로 증가했고, 여행객의 이용률이 높아졌다. 제 4차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제 초고속열차 시대가 열린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열차는 전자기력을 이용한 자기부상열차이다. 2015년 일본에서 시험 운행을 했는데 무려 시속 603km로 달리는 데 성공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1200km를 몇 분 만에 이동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 생기며, 인간의 삶은 또다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냉장고란?


냉장고는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여 식품이나 약품이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다.
냉장실과 냉동실이 함께 있지만, 냉장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온도가 낮으면 박테리아 세균의 번식률이 낮아지므로 냉장고는 식품의 부패율을 줄이는 전자제품이다.
냉장고는 아이스박스를 대체하면서 전자기기의 혁신을 보여주었다.

 

과거의 식품저장방법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에도 보관하기 위해서는 낮은 온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원전부터 모든 인류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낮은 온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얼음이 사용되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중국 전국시대에서 냉장에 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에는 얼음을 수확한 후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하는 집안을 뜻하는 '벌빙지가'라는 용어가 나온다.
즉 이 시기에 얼음을 보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세력이 높은 가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식품을 저장하기 위해 얼음을 활용했었다. 신라시대에는 석빙고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동빙고와 서빙고를 지어 얼음을 저장하여 냉장고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에 얼었던 한강의 물을 깨어 사용하였다.
하지만 여름에 남아있는 얼음은 매우 소량이었기 때문에 왕족이나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같은 시대 서양에서는 짚이나 흙으로 단열 처리를 한 저장고에 산에서 가져온 만년설을 뭉쳐서 벽 사이에 넣고 포도주와 겨울의 얼음을 저장고에 저장해두었다.

 

냉장기술의 원리 발견


이후 기술의 발달로 1748년 어느 날 영국의 과학자 컬렌이 역사상 최초로 인공 얼음에 도전했다. 그는 땀이 마르면서 피부의 열을 빼앗듯이 액체는 기체로 바뀔 때 주변의 열을 흡수한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켈렌은 빠르게 증발하는 물질을 찾았다. 그 물질의 이름은 에틸에테르였고, 이 물질을 이용하여 반진공 상태에서 기화시켜 물을 얼음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되면서 냉장고의 원리를 처음 찾아냈다. 하지만 켈렌은 이 원리를 활용해 냉장고를 직접 개발하지 않고, 단순히 얼음 냉장에서 기계적 냉장고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게 한 것이다.
이후 켈렌의 발견 이후 많은 사람은 냉장 기술을 발달시켰다. 
하지만 냉장고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의견이 나뉜다. 설계나 특성, 작동 원리 등 어떤 분야에 초점을 두냐에 따라 발명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냉장고의 발명과 생산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는 얼음이 녹으면 갈아주어야만 하는 소형 냉장고가 있었다. 이런 얼음을 넣는 냉장고가 있었기 때문에 매일 얼음을 배달해 주는 아이스맨이 인기 직업이었다.
1805년엔 미국인 올리버 에반스가 증기 압축식 냉장고를 설계하였고, 제이콥 퍼킨스가 냉장고의 제작 원리인 공기 냉동 압축기를 발명했다.
1862년에는 영국인 제임스 해리슨이 에테르를 냉매로 사용한 공기압축기를 장착한 냉장고를 발명하였다. 
그리고 1875년에 독일의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였던 린데가 암모니아를 냉매로 하는 냉장고를 발명하면서 냉장고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그 이후 20세기 들어서 냉장 산업이 성장하면서 가정용 냉장고가 1910년대부터 출시되기 시작되었다.

냉장고의 보급이 된 이후에는 유럽인들의 평균신장에 변화를 가져왔는데, 신선한 식품을 제때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괴혈병 발병률도 현저히 낮아지게 되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식재료의 보관이 늘어남에 따라 유통기간이 급격히 늘어났기에 노동과 장기 전쟁이 가능해졌고, 산업의 발달이 급진적으로 바뀌었다는 의견이 있다.


우리나라의 냉장고 


1965년은 우리나라가 경제적 성장을 우리는 때였습니다. 집안에 전자기기 있는 곳이 드물던 때에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집에서부터 가전제품들이 가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비쌌던 제품은 바로 냉장고였다. 
당시 미국에서 만들어서 수입한 냉장고는 일반 서민들은 구입할 수 없을 정도고 가격이 비쌌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냉장고를 개발 상품화했던 곳을 바로 금성사였다. 당시 이 냉장고의 가격은 미국 제품보다 저렴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에겐 여전히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도 처음 시중에 판매한 6천 대가 15일 만에 동이 났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냉장고는 600가구에 한 가구만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희귀한 고급 전자기기였다. 하지만 전력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냉장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부의 상징으로서 대청마루와 안방에 두었고, 대다수의 농촌사회에서는 여전히 냉장고 없이도 생활을 유지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점차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나라는 일반인들도 냉장고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금성사, 삼성전자, 대한전선이 경쟁하였고, 70년대 후반에  삼성과 금성이 양자 대결을 이루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우리나라에서 냉장고는 모든 가정에서 갖고 있게 되면서 양문형 냉장고와 김치냉장고가 개발되는 냉장고의 변신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냉장고는 우수한 성능 대비 저렴한 가격으로 수출하게 되면서 성공적인 결과를 기록하게 되었다.
1965년에 금성사에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냉장고는 산업 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우리나라 냉장고의 기술발전과 미래


아이스박스를 사용하던 우리나라는 냉장고 시장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을 해왔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지만, 최근 시대적 변화가 빠른 만큼 첨단전자기술을 탑재한 냉장고가 만들어지고 있다. 내부를 볼 수 있는 냉장고, 보관 중인 식품을 활용한 레시피를 보여주는 냉장고, 메모장 기능이 있는 냉장고, 얼음을 만들어 주는 냉장고 등 냉장고의 기술 발전은 여전히 소비자의 의식과 함께 이루어져 가고 있다.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냉장고처럼 다음 세대에는 어떤 물건이 우리 삶의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해진다. 

커피의 시작

커피가 세계적으로 어디에서 먼저 사용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서기 850년쯤 커피 섭취를 한 것과 에티오피아의 카파 주에서 커피나무가 발견된 것이 증명되었다. 에티오피아 내에서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에 커피는 빵에 발라먹는 스프레드형태로 먹고 마셨다고 한다.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에게 커피가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음료의 개념이 아닌 약재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이라고 불렀고 네덜란드어로 코피(koffie)로 였던 것이 영어로 들어간 것이다.

 

커피의 발견과 관련된 하나의 설이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목동으로 살던 칼디라는 사람이 염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칼디가 키우던 염소들이 저녁이면 돌아오지 않아서 찾으러 갔다가 커피나무에 열린 빨간 커피열매를 따먹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커피열매를 먹은 염소들은 잠도 자지 않고 뛰어다녔다. 칼디는 이 열매의 효능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먹어보았고, 각성 효과가 있음을 깨닿고. 인근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천국에서 온 열매라고 소개하자, 수도자들은 이 열매가 악마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불 속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그 향기에 모두 빠져서 커피를 볶아 먹게 되었고 이후 다른 수도자들도 피곤함을 없애려고 직접 커피열매를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커피콩에 물을 섞어 마시기 시작하여 커피음료가 탄생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커피와 관련한 여러가지 설들이 있다.

 

조선시대에 커피가 들어오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기록된 것은 조선 후기 철종때이다. 조선 천주교회 4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신부가 홍콩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낸 편지에 '커피'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고종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것은 아관파천때라는 것보다도 36년이 앞서는 것이다.  편지의 내용에는 베르뇌 신부가 "커피20kg"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커피는 이듬해 조선으로 입국한 랑드르 신부를 통해 잘 전달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베르뇌신부는 점차 더 많은 양을 요구하였던 것으로 보아, 함께 거주하던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과 나눠 마셨을 것으로 추측이된다. 리브와 신부가 쓴 기록물을 보면 조선에서 온 학생들이 음식이 맞지 않아 힘들어했지만 잘 적응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때 커피를 접한 최초의 한국인이 김대건 신부와 최씨 형제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에서 커피를 수입한 최초의 기록은 인천항이 개항한 18838수출입일람표에서   있다. 개항이 더 빠르게 이루어 졌다면 기록도 더 앞섰을 것같다.

 

1846병오박해 이후 부터 병인박해가 일어나까지 20년 동안 천주교 선교는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고종의 즉위가 이루어 질 때까지 신도는 2만여명이었고, 고종의 유모 또한 천주교 신자였다. 이렇듯 천주교의 전도와 함께 커피도 왕실에 전해졌을 수 있다는 논문이 있다.

아관파천이 이루어지기 13년 전부터 커피를 수입을 할  커피시장이 확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조선의 궁궐을 방문하는 귀한 손님들에게 커피를 대접하였다.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기록되어 있는 호러스 알렌은 경복에서 커피를 내어 주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이 시기에 커피가 유행이었음을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증언했다.

 

커피가 유행하다.

 

커피의 대중화는 조선 말기에 발행된 독립신문을 보면   있다. 신문에 광고가 실려 있었는데 1897320"정동의 '골스찰키'에서 자바 커피를 판매한다"라는 애용이 게재가 되었다. 1899서울전차가 개통된 이후에는 일반인들도 커피를 접할 수 있는 커피판매점이 등장했다.  또한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인천의 서구적 문화가 한양으로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한양에 거주하게 된 서양인들이 3천명정도 되었다. 커피는 고종이 국권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다. 사실상 영빈관으로 활용되었단 손택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본에 저항하는 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을사조약과 함께 이 호텔은 조선 침탈을 위한 아지트로 악용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서 커피와 관련된 기록은   없다.

일제 시대에 커피는 일반인들을 거들떠도 볼 수없을 정도의 기호식품이었다. 당시 커피 한 잔은 10~15전이었는데, 조선인 노동자의 일당이 60~80전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미군부대를 통해 인스턴트 커피가 일반인들에게 퍼지게 되었다. 당시 커피는 설탕을 첨가한 '서양탕국'으로 불리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값이 싸고 회충퇴치에 좋다는 소문이 널리 전해지며 커피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주고객은 문화 예술인과 지식인들이었다.

 

커피의 존재감이 커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커피는 교과서에 실리게 될 정도로 대중화가 되었지만, 커피로서의 기품은 잃지 않았다. 다방이 지식이들 사이에서 낭만적인 공간으로 바뀌었고 점차 공연장으로 변모 했다. 1970년데는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다방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때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1976년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물만 타면 커피가 되는 인스턴트 커피가 개발되었다.

1980년대부터 인스턴트 커피와 캔 커피가 대중화 되면서 다방은 전국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커피 프랜차이즈카페가 속속들이 생겼고, 스타벅스가 1999년에 처음 진출되었다. 현재 커피전문점, 카페프랜차이즈들은 점자 늘어나고 있고, 집에서도 직접 커피원두를 갈아 핸드드립해서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개항과 함께 늦게 들어온 감이 있지만, 요즘 현대인들에게 커피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커피의 잦은 섭취는 숙면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취시간과  조절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목욕탕의 시작과 역사

 

목욕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생겼다. 최초의 공중 목욕탕은 기원  4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생겼다. 당시 목욕은 시녀가 몸을 닦아주고, 젖은 몸을 닦아주고 기름을 발라주었다. 목욕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함께 닦인다는 인식이 있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청년들이 운동을 하는 체육 시설이 생기게 되자 자연스럽게 목욕탕도 함께 필요로 하게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목욕 문화가 확산되면서 부유층들을 집에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수로가 생겨 많은 사람들이 공공목욕시설을 사용하게 되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목욕탕은 기술적인 문제로 수시로 물을 환수하지 못해 많은 세균과 기생충들로 인해 전염병이 생겼다. 깨끗한 시설이었던 목욕탕이 점차 전염병을 전파 시키는 역할을 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발생했었던 것이다.

 

중세 시대에는 목욕을 하러 가는 것이 매춘을 하러 간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 목욕 대신 사우나가 보급이 되면서 증기 목욕이 유행하게 된다. 결국 중세 말에는 목욕탕에서 전염병이 퍼지게 되면서 목욕탕의 순 역할과 대비되게 병에 걸리고 매춘을 하는 곳이라는 기괴한 풍습이 생겨 목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빈의 경우에는 공중목욕탕이 100여개나 설치될 만큼 인기시설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중세시대 보다 더 씻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은 많은 것에 비해 사회적 시설은 점차 열악해졌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위생을 생각하려면 물을 길러 올 수 있는 상수도 시설이 필요한데, 당시는 그런 시설과 연료가 기술적으로 퇴화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향수가 널리 쓰이게 된 것도 이때부터 였다.

 

이슬람교의 목욕

 

이슬람에서는 알라를 뵙기 전 몸을 씻는 곳이 있었다. 현재에도 이슬람 성원 앞에는 손이나 발을 씨기 위한 시설이 많이 있다. 그 덕분에 목욕탕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곳이 튀르키예이다.

이슬람은 고여있는 물은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욕조는 없지만, 물이 나오는 곳에서 계속 물이 흘러나오게 하여 고이지 않고 흘러넘치도록 유지하고, 별도로 샤워기도 비치되어 .

튀르키예의 목욕 방식과 우리나라의 현재 목욕 방식은 현대화가 되면서 위생 도구가 많아지긴 했지만, 때를 불리고 세신사가 때를 밀어주는 것은 두 나라의 매우 유사한 목욕방식이다.

 

우리나라의 목욕도입 

 

우리나라의 목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신라의 박혁거세의 탄생 화에 따르면 알에서 태어난 아기를 씻기자 빛이 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중요한 의식이었음을   있는 대목이다.

 

신라 시대에는 국교를 불교로 지정했기 때문에 나체로 자주 목욕을 했었다. 훗날 고려 시대가 되었을 때도 불교의 목욕재계 율법은 계속되면서 우리 족의 목욕하는 문화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일신라시대에 증기욕이 발달하면서 일본에 전파되어었고, 일본 서민들의 공동탕으로 확산되었다는 일본 기록이 있다.

목욕은 고려 시대부터 병의 치료와 예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원양으로 온천욕을 즐기러 가기 위해 행궁을 설치했을 정도이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가 아닌 유교 사상을 중시하기 때문에 나체로 목욕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로 간주되어 옷을 걸치고 목욕을 하였다. 옷을 걸쳤기 때문에 전신 목욕은 드물어 지면서 개별 가옥에는 목욕탕이 없었으며, 주로 부분 목욕을 얕은 강이나 호수에서 했다.

전신욕을 하는 날은 연례행사로 별도로 행해졌다.

 

개항 이후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목욕 시설의 불편함을 호소하였지만 개인적으로 가옥 안에 목욕탕을 설치하였다.

개인 주택 안에 목욕탕을 설치하는 유행이 번지자 점차 숙박업소에서도 목욕 시설이 갖춰 진 사업장을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대중목욕탕 

우리나라의 대중목욕탕의 확산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자주 목욕을 하는 일본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부터이다.

당시에는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것 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천한 행동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의 공중 욕탕 설치 요구는 한국 사람들에게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이렇게 목욕 문화는 계속 이어져 오면서 1905년 서울 서린동에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을 문을 열었지만, 나체인 상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문화라서 오래 유지하지 못한  폐업을 하고 말았다.

 

최초의 목욕탕이 문을 열고 14년이 지난 뒤에 왕실에 목욕실이 설치되 었다. 대중목욕탕의 확산은 1920년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일본고객이 주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이태리타올과 목욕관리사도 생겨나고 한국의 목욕문화가 만들어 지면서 타국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이국적인 풍경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광복 이후 사설목욕탕이 확산되자 국가 차원에서 시설 규정을 제정하였다.

 

목욕탕 소멸위기

1990년 중후반에 찜질방이 생기면서 현재 대다수 대중목욕탕에서는 찜질방과 겸업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음식점, 노래방도 설치가 되어 있어 온종일 있어도 심심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목욕을 위해 목욕탕을 찾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각 가정마다 욕조를 설치하고 목욕보다는 간단한 샤워 정도로만 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새해가 다가오는 11일을 앞둔 시기가 되면 목욕탕이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데, 묵을 때를 벗겨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하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코로나 이후 가장 큰 피해를 본 업소  하나가 목욕탕이였고, 현재는 코로나의 여파로 대중목욕탕이 아닌 1세신샵을 운영하는 사업자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한복의 시대별 구분

한복은 고대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는 한국의 전통의상이다. 
우리나라의 사상,관습, 행위, 형태,기술 등의 양식과 우리의 정신이 깃든 것으로 치마, 저고리,바지, 두루마기, 마고자 등이 있다.이와 같이 한복은 상의와 하의로 이루어진 형태이며 상의는 앞이 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여성의 치마는 둘러서 입는 복식인데 신분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모양은 다르게 연출되었다.
현재 한복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신세대의 감각에 맞게 새로운 디자인으로 국내외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한복은 삼국시대  때부터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저고리, 바지, 치마의 기본 구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길이나, 폭, 형태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경되었다. 


고구려/백제/신라 시대


한복은 고구려 벽화에서 처음으로 알려져 기록되었다. 고대 우리 민족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생활하고 삼국 및 가야의 의복은 서로 비슷했다. 
고구려의 의복을 설명하자면, 바지는 통이 넓었고, 저고리는 통이 좁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기다란 포를 입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
여자의 경우엔 치마를 더 입었고, 신분에 따라서 저고리에 문양을 달리 넣기도 하였고, 남자의 경우 신분에 따라서 바지의 종류가 달랐다.
저고리는 모두 엉덩이까지 내려왔었다. 또한 고구려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항상 전투복 형태의 옷을 입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김덕형,고구려는 한국사다) 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옷의 활동성을 중요시 했기 때문에 전쟁에서도 활용가능했었다.
고구려는 기다란 저고리를 고정하기 위해 끈을 허리에 맸었다. 종류는 피혁대, 포백대, 과대 등이 이었다. 이 중 포백대는 흔히 볼 수 있는 대로서 귀족의 경우 폭이 넓었고, 서민은 폭이 좁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백제의 한복은 고구려와 흡사하였으나 화려하고 귀족만의 미적 감각이 발달하여 삼국 중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특징이 있다.  머리에 장식을 하였고, 남자의 경우 신하의 직급에 따라 은제를 부착하도록 하였다. 또한 고구려와 비슷하게 넓은 포를 주로 입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늦은 속도로 발전한 만큼 두 나라와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복식에도 적용하였다. 삼국시대 중 가장 화려했고 금을 가공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많은 귀족들은 나라의 복식을 입었지만 백성들은 기존의 저고리바지, 저고리치마를 입었다. 

 

통일신라/고려시대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는 안정된 국가 상황과 친당 정책이 반영되어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이 특징이다. 42대 흥덕왕 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사치가 날로 심각해 지자 진골부터 모든 계급의 남녀 복식재료에 제한을 두고 사치금지령을 내렸지만, 효과는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당시의 복식은 친당정책으로 인해 당의 스타일이 도입되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무풍적인 복식생활을 이어갔다. 

고려시대에는 치마를 여러 번 휘감을수록 더욱 고상하게 여다. 이런 모습은 고려의 전기에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일부는 통일신라시대의 잔존이다. 고려 후기에는 정치적으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한복에 시각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특히 몽골의 공주가 고려로 시집을 오게 되면서 몽골 의복이 고려 궁중 복식에 큰 변화를 야기 했다. 이때부터 옷고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흰색 모시옷을 입었고 당시 조성된 불상 안에서 나온 직물을 보면 원나라에게서 우리의 것을 지키려고 노력했음을 엿 볼 수 있다. 
사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의 복식유물 자료는 그 양이 매우 적어 고증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대한제국시대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삼은 철저한 계급국가였다. 따라서 관복자체에 계급에 따른 복식을 부여하였다. 병자호란 이후부터 조금씩 저고리를 줄여서 입기 시작하였고, 품도 몸에 맞게 입었다. 또한 치마와 저고리 사이의 겨드랑이 밑을 가리기 위해 넒은 띠를 매었다.그때부터 노리개를 활용하여 장식하기 시작했다.   치마는 점점 더 길어지고 폭도 넓어지다가 18~19세기에는 종의 모양을 갖은 형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한복의 유행은 기녀들을 중심으로 한복 복식의 유행이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관복이 양복화가 되면서 점차 전통 복식도 간소화 되었다. 여자의 경우에는 일본 유학파나 신여성은 양장을 입고 서양식 짧으 치마와 허리까지 오는 긴 저고리를 입은 모습이 혼재했다. 그 외의 일반적으로는 서구식 치마의 영향을 받아 치마의 폭도 짧고 작은 형태로 흰저고리에 짧은 치마 형태를 갖고 있다. 지나치게 짧았던 저고리가 여성의 사회활동이 많아지면서 다시 길어지고 포가 간소화 되며 단추 등의 서양식 부속품이 도입되었다. 

 

한복활용도 침체


근현대에 오면 서양식 양장이 보급되고 수입이 확산되면서 한복을 명절이나 특수한 날에 입게 되었고, 한복의 기능이 생활용이 아닌 예복의 영역으로 분류되었다.  한복이 현대화 예복화가 되면서 금박, 은박, 자수를 놓은 화려한 한복이 유행했다. 
그러나 점차 한복을 자주 입지 않게 되자 ' 한복의 날'을 제정하고 전통한복과 생활한복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한복은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형태는 선으로 면을 분할 살 수 있고 색과 문양만으로도 한복의 형태변화와 미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세기에 걸쳐서 다양한 소재와 색상의 한복을 입었다.

 

한복디자인의 변화와 홍보


현재의 한복은 구한말 조선 후기 때의 이미지와 유사하지만 현대에도 한복의 디자인의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합성섬유와 레이스 등이  덧대어져 소비자의 체형과 취향에 따라 제작되고 또한 다양한 한복 악세사리 상품 등으로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 이후 한복을 입고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현대 한복은 신한복으로서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자동차의 역할과 종류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는 간략히 라고도 불리고 있다.  자동차는 20세기부터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교통수단이 되었으며, 과학기술의 집대성이며, 이용 목적 또한 다양하여, 문명에서 제외할 수 없는 도구 이다.

지금의 자동차의 연료는 휘발유, 경유, 액화석유가스, 압축천연가스, 전기, 수소 등으로 움직인다.

 국가별 선호하는 차량

일본과 유럽에서는 가성비 높은 차량이 판매 수요가 높다. 가격이 저렴하고, 신뢰가 높고, 운전은 손쉬우며, 연료 소모량도 낮고 유지비용은 적게 드는 차를 말한다.

실제 현대차가 쏘나타를 일본에 수출할  때에 배용준 배우를 광고 모델로 선보였지만, 일본의 중년 여성들이 자전거나 경차에 선호도가 높아 차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유럽은 차량 유지비가 높게 책정되어 큰 차를 타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게다가 도로가 워낙 좁아 경차가 가성비가 높다.

수입 고급 차량들이 대부분 유럽에서 수입하다보니 대부분 탈 것 같지만 실상 유럽에서도 독일 3사는 부자들이 사용하는 차량이라는 고급이미지가 있다.

유럽에서 아반떼 수준의 차량을 운행하면 여유로운 사람으로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좁은 골목길이 많고, 주차 공간이 여유롭지 않은 일본과 유럽에서는 경차나 소형차의 수요가 높고, 반면 땅덩어리가 넓고 도로나 주차 공간이 여유로운 미국에서는  차의 선호도가 높다.

우리나라에서는 중형 이상의 자동차가 선호도가 높고, 개인용 뿐만 아니라 가족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인식

우리나라는 차량의 급수가 사회적 지위를 표현한다는 인식이 있다. 10대는 경차/소형차를 선호해 하고 30대는 중형 40대 이상은 대형이나, 가족용 SUV식으로 차량을 바꾼다. 한 때는 이런 우리나라의 인식 때문에 차급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점유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또한 대기업 등에서 임원들의 서열을 명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급수를 달리 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런 권위주의적 인식은 점차 사라지는 중이다.

과거에는 이 차량 자체가 부의 척도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카푸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었지만, 현재의 부의 기준은 부동산이다.

 자동차의 시작

자동차의 역사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브래스기 (1900~ 1918), 빈디지기(1919~1929), 전쟁이전기(1930~1946), 전쟁 이후기(1946~1974), 현대기(1974~)로 나뉜다.

 

자동차가 탄생하기 전에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1885최초 벤츠의 창업자인 카를 벤츠가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를 등장시킨 이후 고틀리프 다임러와 빌헬름 마이바흐가 차기 가솔린 사륜차를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조금 더 늦은 시기에 듀리에 형제가 모터 왜건을 개발하면서 자동차 산업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때 당시에는 마차나 자전거에 엔진이 달린 수준이었고 후진은 불가능한 이동수단이 때문에 주차나 후진을   필요했던 조수가  좌석에 앉아서 함께 이동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대중적으로 구입이 가능한 물건이 아닌 부자가 아니면 가질 수 없었던 귀한 용품이였다.

 

 브래스기(1900~1918)

자동차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로, 이때부터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자동차는 내연기관, 엔진의 선배치, 그리고 후륜 구동방식이 특징이다.  1세계대전이후 자동차의 성능을 급격히 높아졌지만 가격이 대중적이지 않아서 보급을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자들의 레저 스포츠 용도로 활용되었다. .

 

빈티지기(1919~1929)

 

이 시기는 포드사 자동차가 활발히 생산되었다. 당시 포드사 자동차는 비싼 가격으로 책정되었지만, 성능이 좋아 인기가 높았다. 이 자동차는 유럽까지 수출되어 유럽의 자동차 대중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도 프랑스의 시트로엥이 유럽최초 자동차 대량생산방식을 도입하였고, 독일에서는 컨베이어벨트를 활용한 생산방식으로 자동차 생산하기 시작했다.

 

전쟁이전기(1930~1946)

1930~1940년대 까지는 자동차 디자인이 변화가 이루어져 차체의 높이가 낮아지고 길이가 길어져 자동차의 유선화가 이루어 졌다.

한편 미국에서는 대공황으로 세계가 혼란스러운 때에 자동차 제조 회사들의 사업 운영난이 높아졌었고, 인수합병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자동차 산업이 성숙기에 들어섰다. 이때 만들어졌던 자동차들을 클래식 자동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1930년대 중반부터 대공황의 여파가 줄어들자, 유럽의 고급브 랜드에서는 호화스러운 자동차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성능이 좋은 엔진과 예술품이나 다름없는 차체를 탑재한 그랜드 투어러가 유행하였고 이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전쟁 이후기(1946~1974)

세계적으로 기계화, 차량화에 집중되었던 전쟁이라 디자인보다는 기술적인 발전이 가장 크게 이루어 졌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유럽은 차량생산 인프라가 모두 파괴가 되어 소비자들도 구매 심리가 급감하여 대중적으로 오토바이를 대신하는 경자동차가 인기를 모았다.

1950년대에는 전후 경제가 회복하면서 차량들의 디자인도 더욱 고급스럽고 우아한 디자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거대한 차체에 크롬으로 장식한 자동차들이 인기가 있었다.

또 이시기에 출시되는 자동차는 안전을 고려하였고, 자동차 종류별로 세분화 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는 그랜드 투어러의 황금기로 차량의 안전성이 높아지고 연비는 높아졌고 디자인은 유선형으로 이  당시 많이 명차가 생산되었다. 특히 브랜드간의 성능 경쟁으로 유럽에서는 페라리와 재규어, 이태리에서는 람보르기니, 미국에서는 포드 등에서 스포츠 자동차를 너도나도 생산해 내었다. 일본에서도 품질과 가성비의 장점을 선보이며 세계 시장에 자동차를 내세웠다.

이러한 자동차의 급격한 대중화로 1964년부터 유럽에서는 유럽 올해의 차를 선정하고있다.

2025년 유럽 올해의 차는 최종적으로 2년 연속으로 르노가 유럽 올해의 차에 선정되었고, 알핀 브랜드 차량으로는 2번째 도전 만에 선정되었다.

 

1975년 이후 세계적으로 자동차 보유 대수가 3억대를 높으면서 디자인과 기술적으로 급격히 변화했다. 또한 차량의 속도와 연비가 차량 주요 성능으로 집중되면서 전륜 구동과 4륜구동 굴림방식, V6엔진의 적용, 연료분사 방식의 광범위한 기술 활용이다. 이런 기술은  초기에 도 있었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 보통의 기술로 활동되었다.

 다른 특징은 과거에 비해 연료효율과 엔진의 출력율이 향상되었다.

1990년애데는 경제 호황이 절정에 달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자동차 구매 심리가 상승하였다. 우리나라 자동차 브랜드는 독자적인 디자인을 개발하였고, 독자기술 확보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21세기 이후부터 자동차의 기술은 점차 발전을 거듭해왔으며, 디지털 기술을 탑재한 차량이 생산되었다.

 

2020년대에는 테슬라의 등장으로 전기자동차 시장은 커졌고 거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에서는 전기자동차 생산라인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이 라인은 차세대 유망 산업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미래의 자동차

미래 자동차는 안정화  수소자동차와, 충전인프라, 완전한 자율주행, 배터리의 고성능, 고용량, 고전압화 등 미래 지향적 기술 이 야기되고 있고 현재 이러한 미래지향적 기술을 탑재한 자동차들이 연구, 설계되고 있다.

우산의 어원

우산의 옛말은 '슈룹'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도 우산을 '슈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우산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1527훈몽자회의 기록에서 이미 '슈룹'을 한자어인 '우산'으로 대체되어 기록되어 있음을 할 수 있다.

우산의 현재 위치

우산은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 중 하나이다. 집에서 나갈 때는 비가 와서 우산을 쓰고 나서지만, 이후 다시 귀가 할 때는 비가 그쳐 있어서 우산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자주 잃어버리는 물건으로는 지우개가 있다. 둘 다 꽤 큰 돈 들이지 않고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이라 재구매하는 확률이 높다. 또한 남의 것을 본인 것 인줄 알고 잘못 들고 가기 쉬운 물건이기도 하고, 범인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자전거 못지 않게 자주 훔쳐 가는 물건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범죄긴 한데, 검거도 어렵고, 설사 잡았더라도 "내 건 줄 알았어요" 하고 발뺌하기 쉽고, 설령 어떻게 처벌한다 해도 큰 금액을 들이지 않고도 구매 하는 우산으로 엄청나게 높은 처분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 그냥 운이 안 좋았다 치고 새 우산을 구입하기 마련이다.

 우산의 시작

우산은 최초에 만들어 진 때는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서 사르곤 왕 때에 발명되었다. 실제로 그의 승전비에는 시종이 커다란 우산을 전쟁터로 나가는 왕의 머리 위에 커다는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때 당시의 우산은 햇볕이 뜨거운 중동 지역의 태양으로부터 왕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 어진 지금의 양산과 다를 바 없었다. 고대 아시리아나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우산은 기원전 6세기경 발명되었다. 그 당시의 우산은 지금 우산과 비슷하게 접었다 펼 수 있는 금속제 양산이었다. 또한 양산 기능을 포함해 비도 막을 수 있도록 종이에 기름을 먹이고 대나무에 살을 대어 만든 우산도 있었다.

 

현대의 우산은 장 마리우스라는 프랑스 발명가가 1710년경에 만든 접이식 양산이 시작이다. 이 양산은 접이식 양산이라서 휴대성이 좋아 편리했다. 이 것을 인상 깊게 루이 14세가 귀족들에게 유행시켰다. 당시에는 저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처음엔 유럽의 마부들은 우산을 굉장한 발명품이라고 보기 보다는 돈벌이를 방해하는 괴이한 물건이라고 보았다. 그 이유는 당시 비가 오면 사람들이 길가에 있는 마차로 피했고, 그걸로 돈벌이를 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들어서도 유럽사람들은 우산을 잘 쓰지 않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비가 조금씩 자주 오기 때문이다. .

본격적으로 비를 막아 주는 우산이 대중화 된 것은 영국의 발명가 조나스 한웨이가 발명한 우산이다. 웨이는 중국에서 우산을 처음 접한 후 지금과 같은 박쥐날 모양의 우산을 발명하여 특허를 받고 유럽에 퍼뜨렸다.

 

 우리나라의 우산

우리나라 80년대초반에 만들어 진 우산은 중국처럼 대나무 살에 천을 붙인 우산이거나, 청비닐을 대나무에 붙인 우산들이였다. 이런 우산을 구입하려면 당시 짜장면  그릇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고가였다. 그러나 가격에 비하면 내구성이 현저히 떨어져서 비가   쓰는 우산은 잠깐 쓰고 버리는 일회용에 가까웠었다. 현재 이런 우산은 박물관에 가보면 볼 수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대나무 비닐 우산은 50여개 남짓이라는 기사가 13년도에 기재되었다.

옛날 우리나라의 우산의 형태를 엿볼  있는 영화가 바로 영화 홀리데이에서 최민수가 들고 있는 우산이다. (이것 역시 찢어져 있다.)

 

흔히 우산은 비가 올 때 머리 위에 소형 장막을 펼쳐서 몸이 젖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우산은 대체로 폭이 80~100cm정도 이다. 대체로 우산대에 걸려서 접혀 있다가 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우산대 길이는 폭보다 더 작은 정도 이다.

우산을 사용할 때는 시야의 확보를 위해 우산 챙이 머리 부분의 반만 가려지게 된다. 그러면서 바람이 세게 불면 비의 각도가 꺾여 바짓가랑이부터 젖어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우산의 단점은 현 시점이 되어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이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방향으로 우산을 기울면 어느 정도 커버 되기는 하지만, 시야가 가려질 수 있다. 이럴 때에는 투명 우산을 쓰는 등 날씨에 따른 우산을 선택해야 한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우산이 바람을 버티지 못해 구부러지거나 꺾이는 망가져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를 구조적으로 해결한 우산이 있지만, 가격이 매우 비싸다.

우산은 주로 우산살을 손으로 밀어 올려서 고정 시키는 방식의 우산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우산은 다시 접을 때에 손을 다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요즘 나오는 자동 우산은 우산 내부에 용수철이 들어 있어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동으로 펴지는 우산이 있다. 이 우산은 실수로 버튼을 누를 상황에서도 펴지는 상황이 벌어지지만, 펴고 접는대 손가락 하나면 된다는 큰 장점이 있다.

 우산의 역할

우산은 단순히 비나 햇볕을 막는 용도 뿐만아니라, 무기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897공산주의국가 불가리아의 반체제 인사인 게로으기 마르코프가 BBC방송국에 나오는 도중 우산에 살짝 찔렸다. 그 다음날 새벽 그는 고열에 시달렸고, 병원에 옮겨졌지만, 패혈증으로 인해 백혈구 수치가 어마 무시하게 올라가 있었고, 4일 뒤 그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마르코프의 몸을 부검하는 도중 그의 대퇴부에서 1.5mm금속 탄환이 발견되었다.

그 속에는 리신이라는 치명적인 맹독이 검출되었다. 그는 불가리아의 공산당의 부패를 규탄했다는 이유로 쫒겨났는데, 소련의 KGB에서 차출된 요원이 실수로 우산으로 찐 척 하며 청부살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우산은 미국에서 호신용으로도 판매가 되고 있다.

 

우산의 형태변화

이러 듯 우산의 역사는 길지만, 그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세상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지만 우산만큼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우산의 단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우산이 나오기는 할까??

전기의 발견

전기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때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래서 철학자 탈레스가 나무 송진이 굳어져 생긴 호박을 모피로 문지르다 가벼운 물체가 끌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전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때문에 전기의 이름인 exelctricity는 고래 그리스어로 호박을 뜻하는 elektron 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6세기 윌리엄 길버트가 전기를 시기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를 통해 전기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생겨나고 전기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런 마찰전기에서 화학적 방법으로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게 된 건 1800년 이탈리아의 과학자인 알렉산드로 볼타가 전기를 담아둘 수 있는 충전지를 발명하면서였다. 1882년 에디슨이 일류 최초의 발전소를 설치하고 백열전구를 발명하면서 전기공급을 위한 체계를 수립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민국의 전기의 역사


1887년 당시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경복궁 건청궁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불이 밝혀졌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에 주위에 모여든 남녀노소들이 모두 감탄했다고 기록이 남겨져 있다. 당시만 해도 전기는 문명의 총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향원정 연못가에 세워진 발전기는 당시 동양에서도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이었다고 한다.
향원정에 세워진 발전기로 인해서 연못 수언이 상승하여 물고기가 떼 죽임을 당하고 그 소리 또한 천둥 치는 듯했다고 한다. 
이후 189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회사'가 미국인 콜브란의 조언 아래 설립하였고, 이 회사는 주로 한성의 전차, 전등, 전화 사업 운영권을 허가받아 회사를 운영하였다. 이 회사가 설립되면서 서울 흥화문에서 동대문 간에 전차가 개통되었는데,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명성황후가 시해가 된 후 명성황후 묻힌 홍릉을 자주 찾았던 고종황제는 '황실 전용 전차'를 보며 상여처럼 생겼다고 하여 잘 사용하지 않았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오고 있다.
 한성전기회사는 전등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1901년이 되면 전등 보급이 더욱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정부의 고관대작, 외국사절, 상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행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지금의 충무로의 점등식은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든 엄청난 행사였다고 한다.
사업의 확장으로 한성전기회사는 1944년 대규모 수력발전소가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우리나라 전체 발전 능력은 향상되었다. 특히 동양 최대 규모인 60만kW 하이 댐 방식의 수풍발전소와 22만V급의 동양 최초 초고압 송전시설은 당시 세계 전력 사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한성전기회사는 지금 한국전력의 모태가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전력 사업은 일본의 규제 아래 있었고, 당시 조선인들은 전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다. 

광복 후 당시 남한은 전력 사용량의 70%를 북한에서 공급받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5월 14일 남한 단독으로 총선이 치뤄지자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초치를 감행하게 되었고, 갑작스러운 단전으로 인해 남한의 주민들은 심각한 전력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 당시의 혼란은 일제강점기에서조차 겪지 않았던 것으로 대중화 되었던 전기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은 전후 상황 전원복구 사업으로 전력공급에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고, 1961년 조선 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당시 주요 전력 3사가 통합되어 '한국전력 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이로써 전력 산업은 다시 한국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전원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농어촌과 산골, 섬에 사는 주민들도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농어업의 생산성이 증가하였고 국민들의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한국전력의 전력 생산 기술은 급속히 발전했고 전력 생산이 현저히 늘어났다. 또한 우리나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연대에는 대규모 효율적 전력 생산과 환경을 함께 생각하는 기술인 원자력발전을 시작하게 된다. 원자력 발전을 도입하여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고 전력 생산 단가를 낮추는 데 기여하기 위해 세계 21번째로 설된 고리 원자력 1호기는 우리나라 건설 사상 최대의 투자가 이루어 졌다. 제 3의 불이라고 불리는 원자력 발전은 한국표준형원전개발로 이어졌다. 이는 안전성과 운전 편리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세계 최첨단의 원전이고 원자력 발전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 이였다.

이후 한국전력은 미국 에디슨 전기협회로부터 에디슨 대상을 받게 된다. 에디슨 대상은 전 세계적으로 전력기술과 경영 성과가 세계 최고인 전력회사에 수여되는 상인데 1997년과 2006년 2회 받게 된다.

1995년에는 한국전력 설립 이후 최초의 해외사업으로 필리핀 말라야 발전소 운영 사업을 수주하였고, 2009년 세계 강국들과 경쟁하여 UAE에 한국형 원전을 수출하게 된다. 우리나라 원자력 역사 50년 만의 쾌거로 불리고 있는 이 해외원전 수출 성공은 우리나라의 전력기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기의 성장과 미래

우리나라 전기의 역사는  지켜볼 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한국 전력산업은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려갈 수 있도록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스마트 그리드를 구축하여 EMS 시스템을 활용한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데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력 산업은 점차 친환경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하는데 더욱 힘을 쓸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전기 기술은 약 100년의 세월 동안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낸 우리나라의 전기 기술은 세계적인 기술력으로 여타 선진국과 함께 할 만큼 발전을 해왔다. 현재는 한국전력공사의 경영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 또한 잘 이겨내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혁신을 이루어 내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담배의 역사

담배는 고대 마야인들에게 신의 화신으로 여겼다. 종교의식을 거행할때 담배를 사용했으며, 독이 있는 짐승을 막을 때에도 담배를 이용하였다. 흡연이라는 단어 자체가 연기를 빨아들이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신전같은 곳에서 처방받아 피운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대항해시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잎담배를 원주민에게 받아온 뒤로 유럽 전역에 퍼졌다. 당시 담배를 만드는 기술은 원주민들만 보유하고 있었고, 삽시간에 담배의 인기는 퍼져나갈때 담배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자 했지만, 흡연자가 늘어나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담배의 전파와 발전

담배가 유행하기 시작하며 프랑스인인 장 니코라는 사람이 약초로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니코틴의 어원 또한 장니코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요즘에도 시가담배가 있는데 시초의 담배가 시가담배였다. 자르다가 남은 시가잎을 종이에 말아 피우는 궐련, 파이프 속에 담뱃잎을 넣어 피우는 파이프 담배가 생겨났다.

담배의 부작용과 전쟁 시기의 보급

당시 흡연자들은 담배의 효능에 대해서 구취제거, 소화력 증강, 정신안정 등 긍정적인 이유를 들었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담배는 소화를 방해하고 구강상태를 망치는 악효능이 있을 뿐이다.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을 하는 동안 담배는 정식보급품이 되었다. 당시 미군은 전시상황에 마시는 술보다 긴장완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담배와 커피를 적극 권장하였다. 반면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담배를 피는 행위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고, 장교들에게 담배의 공급을 지양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담배 역사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하여 담배가 처음 들어왔다. 당시의 담배는 약초로 기록되어 있고, 당시 파이프 담배의 일종으로 곰방대라고 불리며 사용되었다. 예의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이지만 초기에는 담배에 대해서 예외가 되어 맞담배도 신경쓰지 않았으며, 남녀노소 모두 자유롭게 담배를 피웠다. 조선의 왕중에서는 정조가 술과 담배를 즐겨했다. 담배와 관련된 글까지 직접 쓸 정도 였다. 한 일화로 정조는 신하들에게 담배를 피우는 시간에 시를 짓게 하는 시험을 치렀는데, 그 시험에서 합격한 자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정약용 역시 정조 못지않은 애연가였음이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담배가 건강에 좋지 않고 돈이 드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부분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담배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일제시대 때에는 대한매일신보에 금연 동맹선언문을 게재하여 담배값을 아껴 빚을 갚자는 운동까지 추진했었을 정도로, 이 운동은 기생과 고종도 동참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담배는 끊기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농촌지역에서 기생충에 대한 약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금연운동은 큰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담배 전매제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흡연에 대해 관대 하게 생각했다. 한국 담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제품은 군요담배인 화랑이고, 한국에서 최초로 자체제작된 담배는 광복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승리라는 담배 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필터담배인 아리랑이 나와 점차 품질이 향상되어왔으며 1990년대 이후 국산담배의 수출이 본격화 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다.

전자담배와 현대의 흡연문제

최근에는 흡연식 담배의 대안제품으로 카트리지에 들어 있는 용액을 증기상태로 흡입할 수 있도록 만든 전자담배가 유통되고 있다. 전자담배는 흡연의 욕구를 충족해주면서, 니코틴의 양을 줄여나가는 방법으로 금연할 수 있다고 광고하고 있지만, 니코틴이 들어 있기 때문에 금연보조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져 있으며, 일반 담배와 같이 전자담배 또한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고시되어 있다.

 흡연율 변화

현재 우리나라는 흡연율이 줄어들고 있고 금연하고자 하는 흡연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수요가 급격히 커지기 시작한것은 2015년 보건복지부의 담뱃값 인상과 함께 금연 치료 지원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년 남성들의 흡연인구는 줄어들고 있지만, 여성과 청소년 흡연인구가 늘어나는 현실이다. 

한 때 대한민국에서 한국담배인삼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한 바 있는데 흡연자들이 흡연으로 인해 폐암과 후두암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법원에 의해 기각되어 현재는 금연을 유도하는 경고 문구로 표시된 폐암, 후두암, 구강암, 심근경색, 죄졸중 등의 질병사진과 간접흡연, 임신부흡연, 성기능장애, 피부노화, 치아변색, 조기 망을 경고하는 그림을 의무적으로 삽입하고 있다.

흡연의 오해와 진실

흡연을 하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준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금연을 했을 때 금단증상 해소로인해 순간적으로 쾌락을 느끼는 순간을 스트레스 해소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흡연을 하면 신체스트레스는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 졌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높은 흡연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여성의 경우 금연에 실패하거나 재흡연 하는 요인 중 하나는 우울한 기분 때문이다. 직장내 스트레스나 갈등상황이 발생할 때 흡연을 하고 있으며, 체중변화나 체중증가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에 금연 후 일시적 체중증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금연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흡연시 식욕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 뿐이지 지방을 줄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한 탈모유전요인을 갖고 있는 사람 중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더 빨리 탈모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고, 흡연자의 경우 피부 주름과 노화의 진행이 촉진된다.

 

마지막

담배는 인체에 해로울 뿐만아니라 사회적으로 기피되는 물건이므로, 흡연자들은 금연을 통해 건강한 삶을 되찾고, 흡연 외 본인에게 긍정적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줄여나갈 수 있어야 한다. 담배 판매를 금지하면 된다는 의견도 있지만, 오랜 기간 흡연을 해온 사람들에게 강한 반발을 살 수 있으며, 담배관련 사업자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또한 국가적으로 세수감소로 이어질 수 있기때문에 담배판매 금지는 쉬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책이 아니다.

+ Recent posts